세기의 대결
1. 세기의 대결
올해 있었던 많은 스포츠 이벤트 가운데 내가 가장 집중했던 것은 단연 이세돌과 구리의 바둑 10번기였다. (그 다음은 아시안게임 역도 경기였음.)
지난 9월 28일 일요일. 21세기 최초의 10번기가 막을 내렸다. 이세돌과 구리. 당대 최고의 고수가 누구인지를 가리기 위해 두 사람이 돈과 명예, 어쩌면 바둑인생 전체를 걸고 한 달에 한 판씩 모두 10판을 붙는 승부를 벌였다.
이 10번기에서 이세돌은 평생의 라이벌 구리를 상대로 6대 2 완승을 거두었다. 우승한 이세돌은 8억5천만 원의 상금과 명예를 가졌다. 반면 패배한 구리는 3천2백만 원이라는 여비 조의 모욕적인 상금과 모욕 그 자체를 갖게 됐다.
대단한 바둑팬은 아니지만 이 세기의 대결을 놓치지 않으려 대국마다 기보와 해설을 챙겨 보았다.
2. 10번기
20세기의 10번기는 오청원의 것이었다. 살아있는 기성이라 불리던 그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신포석'이라는 새로운 바둑을 창시한 사람이다. 당시 일본 바둑 400년은 실리의 시대였다. 가장 적은 수의 돌로 효율적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귀를 중시하는 철학이 400년을 지배했다. 당장 손에 잡히는 집이 승부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 철학을 단 번에 무너뜨린 천재가 중국인 오청원이다. 그는 '당장 집이 되지 않고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아 허망한 중앙'을 당당히 바둑의 역사 위에 올려놓았다. '멀리 내다보고 힘을 발휘하는 세력'의 시대를 열었다.
눈에 보이는 실리가 아닌 멀리 내다보는 세력이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당장 별 가진 것 없는 내 처지에서는 충분히 존경스럽다.
오청원이 정말 존경받는 이유는 새로운 철학을 탄생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철학을 처절한 승리로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당대 일본 최고의 고수들과 10번기를 시작했다.
당시 10번기는 '치수고치기'였다. 지면 상대적 단수를 내려야 하는 (치수를 고쳐야 하는) 모욕을 당하는, 말 그대로 사활이 걸린 바둑이었다. 그는 홀로 일본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그들의 바둑전장에서 싸우는 전사였다. 10번기 대국은 매번 엄청난 관심 아래 치러졌다. 어느새 10번기는 그에게 단 한 판만 지더라도,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기는 벼랑 끝 전쟁이 돼버렸다. 그 전쟁에서 그는 버텨냈다. 아니 압도했다. 1939년부터 55년까지 17년 동안 당대 최고의 일본인 기사들을 상대로 105판을 두어 그들의 단을 모두 끌어내렸다. 그는 중국의 영웅이자, 세계 바둑의 역사를 바꾼 신화였다. 이 살아있는 신화는 올해 100세 생일을 맞았다.
살아있는 신화 오청원 (출처 : 위키피디아)
3. 실리와 세력
바둑에서 가장 오묘한 것이 바로 이 실리와 세력이다. 둘은 절대 한꺼번에 손에 넣을 수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실리를 탐해 발빠르게 집을 차지하는 자는, 결코 두터운 세력을 얻을 수 없다. 반면 중반전 이후 전투에 대비해 두터운 세력을 쌓은 자는 당장 손에 잡히는 실리를 포기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본인의 취향, 기풍이 좌우하지만, 때로는 원치 않더라도 판이 그렇게 짜일 때도 있다.
내게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실리가 없다. 실리를 빼앗겼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내 선택의 폭은 좁다.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은 두터운 세력을 쌓으며 언젠가 중반전 이후 올 전투에서 이 두터움이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해야만 한다. 일본 한 가운데 뛰어든 오청원도 그런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바둑판의 중앙은 매우 넓다. 그러나 허망하다. 아무 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세력을 지향해 두텁게 쌓아 두더라도, 중반 이후 어느 새 실리에서 확실히 밀려버린 자신을 문득 발견하고, 중앙을 지향하는 두터움이 허망한 꿈일 뿐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반면 실리를 탐하는 자는 초반에 집으로 앞서갈지는 몰라도, 중반 이후 정작 중요한 전투에서 상대의 두터움이 밀려 손아귀에 들어온 것만 같던 소유물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목도할지도 모른다.
내가 기풍을 논할 정도의 실력은 못되지만(궁금해하시는 분들 있을지 몰라 밝혀둔다. 인터넷 바둑 3~4단 오가는 정도다.) 굳이 선호도를 말하자면 나는 중앙을 중시하는 두터운 세력 바둑을 지향한다. 그런 성향 덕분에 지금의 기약없는 처지를 큰 불안감없이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손자는 자신의 병법서에서 "求之於勢 不責於人(구지어세 불책어인)"이라는 말을 남겼다. 세에서 승리를 구하되 사람을 탓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세라는 것은 높은 산 위에서 돌을 굴리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패배했다면 사람을 탓하지 말고, 세를 읽고 이용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라는 뜻이리라.
사람을 탓하지 말자. 세를 만나지 못한 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실망스럽다. 탓해야 할 건 세를 읽고 세에서 구하지 못한 나 자신이다. 눈덩이의 시작은 미미하듯이, 세에서 구하는 일은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4. 조금 늦은 10번기
이세돌과 구리, 두 사람은 1983년생 동갑내기다. 이창호의 독주시대가 끝나가던 21세기 첫 10년 간 그들은 쟁쟁한 세계대회를 양분했다. 두 사람의 10번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은 사실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그러나 성사는 쉽지 않았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10번기는 그 자체로 매우 흥분될 만한 일이지만, 패배한 자가 짊어져야 할 엄청난 부담이 문제였다.
2012년 삼성화재배 세계대회 결승에서 두 사람이 맞붙었다. 3번기로 벌어진 이 결승에서 구리가 먼저 1승을 거두었다. 이어 벌어진 2,3국에서 구리는 매판 우세했지만,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이세돌에게 역전당했다. 두 판 내리 반집을 지면서 우승을 내줬다. 엄청난 바둑팬이던 중국의 가구회사 몽백합의 회장 니장건은 구리의 팬이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구리가 이세돌에게 지다니. 그것도 반 집차 두번의 역전패로. 그것은 실력이 아니었다. 진짜 실력을 가리려면 적어도 열 판, 10번기를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한국과 중국 기원, 그리고 당사자 두 사람을 설득해 드디어 대회가 성사됐다.
우리나이 32살, 요즘처럼 어린 천재들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에 이미 전성기가 살짝 꺾일 나이다. 실제로 2012년까지 두 사람은 자국 랭킹 부동의 1위를 지켰지만, 새로운 신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두 사람의 자국 랭킹은 그새 3~4위 권으로 밀려있었다.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세기의 대결이 그렇게 시작됐다.
5. 대국 양상
올해 1월 중국 베이징에서 10번기가 시작됐다. 1국과 2국에서 이세돌은 내리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어진 3국과 4국에서 내리 패배했다. 특히 10번기 일정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이 아닌 한국, 그것도 이세돌의 고향 신안에서 벌어진 4국은 힘 한 번 못써본 맥없는 패배였다.
5국은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구리는 3,4국을 모두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벌어진 다른 대회들에서 이세돌을 두 차례 더 꺾었다. 상대전적 4연승을 안고 기세를 몰아칠 판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윈난성에서 열린 5국의 최대 변수는 체력이었다. 해발 수 천 미터 높이의 부족한 산소는 두뇌가 필요로 하는 산소량을 충분히 공급하기 어려웠다. 이세돌은 그 점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다른 일정을 모두 조정하고 미리 윈난에 도착해 고산지대에 적응을 끝내고 구리를 기다렸다. 반면 구리는 중국 최고의 인기 바둑기사에게 요구되는 일정을 포기하지 못했다. 불과 하루 전에 도착한 그는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 그 결과 유리하던 바둑을 어이없는 실수로 그르치며 결정적 분수령이 될 5국을 이세돌에게 내주었다.
6,7국은 5국과 양상이 똑같았다. 구리는 초반 유리하던 바둑을 실수로 그르치고 내리 역전패했다. 5:2. 이제 단 한 판이면 끝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8국은 구리의 고향 충칭에서 열렸다. 이세돌이 고향 신안에서 맥없이 패배했듯이, 구리 역시 고향에서 열린 8국에서 힘도 제대로 못써보고 무너졌다. 이렇게 21세기 첫 10번기는 이세돌이 여섯 판을 먼저 이기며 6:2 완승으로 끝났다.
6. 처절한 심리전
이 승부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바둑은 심리전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 더구나 이세돌과 구리같은 실력차를 가늠하기 힘든 정상급 기사들의 대국, 그것도 돈과 명예, 바둑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는 역사적인 10번기는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바둑을 전혀 모르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배울 것이 있다.
1) 구리의 부담감
10번기 대국 일정 가운데 4국을 제외한 9판은 중국에서 열리도록 일정이 짜였다. 이것부터 문제였다. 구리는 비록 자국 랭킹 1위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여전히 중국인들에게는 최고의 영웅이다. 대국이 열리는 도시마다 하루 전날 성대한 전야제가 열렸다. 그 도시, 또는 성의 바둑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한 중국인들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이구동성으로 만찬사를 했다. "내일 대국에서는 우리 구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구리는 전형적인 대륙인이다. 호방한 성격이라 웬만한 일로 찡그리지 않고 예민하게 굴지도 않는다. 그러나 매 대국을 하루 앞두고 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조국의 팬들이 몰려들고, 그들 앞에서 바둑을 두어야 하는 심정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건 이세돌도 마찬가지다. 고향 신안에서 열린 바둑에서 맥없이 무너진 4국이 그랬다. 구리에게는 매 대국이 고향에서 열린 셈이다.
더욱 잔인한 것은 그렇게 대국이 끝나고 패배한 마음을 다스리기도 전에, 기자회견과 인터뷰에 응하고 팬들 앞에서 복기까지 해야했다. 제한 시간 각자 4시간 바둑. 하루 종일 체력과 정신력을 모두 쏟아부은 뒤, 쓰라린 패배의 고통을 한 번 더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곱씹어야 하는 잔인한 고문을 당한 셈이다. 이게 프로페셔널의 숙명일까? 나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2) 이세돌의 집중력
그의 올해 성적은 엉망이다. 10번기를 제외하면. 그는 올해 벌어진 대부분의 세계대회에서 결승 근처에도 못 가보고 탈락했다. "이세돌이 이제 무너지는 건가? 10번기 불안하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3,4국을 내리 패하고, 동시에 벌어진 다른 대회에서 연달아 구리에게 패하자, 이세돌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졌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그는 마치 올 한해 모든 에너지를 10번기에 쏟아부은 사람같았다. 10번기에 쏟아부을 에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대국에 에너지를 아껴쓰는 것같았다. 내게 지금 가장 중요한 순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것을 넘어, 본능적으로 그 순간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아껴뒀다 집중할 수 있는 능력. 그건 무언가를 엄청나게 열망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힘일 것이다.
3) 계산된 모험
특히 7국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세돌은 중반 구리의 결정적 실수를 딛고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 구리는 그 판을 뒤집기 위해 판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바둑은 냉정하다. 상대가 불리함을 느끼고 판을 흔들어 올 때 끝까지 수읽기를 해서 응징해야 하나? 아니 이기기 위해서라면 꼭 그럴 필요가 없다. 적절히 양보해도 내가 이길 수 있다면 모험할 필요가 없다. 냉정한 승부사는 철저한 계산(형세판단)을 한 뒤, 양보해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서면 싸우지 않는다. 목표는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대국의 승리니까. 20집을 이기든, 단 반 집을 이기든 승리는 승리니까.
그러나 그날 이세돌은 달랐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구리에게 단 한 집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응징하려 들었다. 대국을 해설하던 유창혁, 김성룡 두 사람은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 "아니, 양보하고 타협하면 안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데, 이세돌 선수 왜 저렇게까지 하죠? 판이 어지러워졌어요. 구리한테 말린 것같은데요. 불안합니다."
이세돌이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싸운 이유는 전투에 자신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냉정함을 잃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대국 종반 무렵 산전수전 다 겪고 50대에 접어든 승부사 유창혁 9단은 이렇게 평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이런 취지로 이해했다.
"저건 승부사의 또 다른 계산이다. 10번기는 한 판으로 끝나는 승부가 아니다. 항상 다음 판이 있다. 상대가 나를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하고, 미쳐버릴 정도로 질려버리게 만들어야 심리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다음 판을 시작할 수 있다. 이세돌이 냉정함을 잃은 게 아니다. 그는 진짜 승부를 위한 계산된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10번기가 끝나더라도 이세돌은 구리와 또 맞붙을 것이다. 그들의 승부는 단 한 판에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라이벌이다. 이세돌은 10번기 다음 대국은 물론이고, 그 후까지 멀리 내다본 승부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7. 패배의 숙명 - 구리를 생각하다.
이세돌과 구리는 매우 친하다. 그들은 인터뷰에서 이구동성으로 "두 사람의 대국은 늘 재미있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감사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바둑판 위에서 우정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처절하게 상대를 짓밟기 위한 피튀기는 싸움판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앞으로도 지속될까?
구리는 상처를 입었다. 어쩌면 회복 불가능한 수준일지 모른다. 국적을 떠나 내가 개인적으로 감정이입을 한 쪽은 구리였다. 처절하게 짓밟히고 모욕당하고 패배의 쓰라림을 미친듯이 반복해 되씹게 하는 잔인함을 지금 그는 힘겹게 견디고 있을 것이다. 바둑을 다시 둘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구리가 반드시 재기해주기를 바란다. 이세돌이 7국에서 멀리 내다본 계산된 모험을 잔인하게 감행했듯이, 구리 역시 암흑같은 터널을 처절하게 통과해내고, 10번기가 아닌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냉정하고 너른 시야를 갖게 되길 기원한다. 바둑팬으로서뿐만 아니라, 고통과 패배를 공통의 숙명으로 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그에게 지금까지 견뎌낸 처절함에 대한 찬사와 응원을 간절히 보내고 싶다.
2014년 10월 2일 책읽는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