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인간에게 던지는 의미
과학은 인간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가?
1. 서론
2012년 1월 MBC 기자회는 수년 동안 누적된 언론 자유 침해와 유무형의 검열, 불공정 보도에 항의해 보도국장 불신임 투표를 진행하고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곧이어 노동조합도 공정보도를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은 170일 동안 계속됐고 패배했다. 7명이 해고됐고 수십 명의 기자와 PD가 징계를 받고 취재와 제작 현장에서 쫓겨났다. 1
파업이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는가는 별론으로 하고, 이 사건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장기 파업은 압박과 회유, 생활고, 갈등과 회의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 결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나 자신의 민낯을, 보고 싶지 않았던 본성을 보게 되었다. 파업의 패배는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가에 대한 회의, 그리고 내가 믿어왔던 ‘선하고 합리적인’ 인간의 본성에 관한 불신을 안겨주었다. 유배 생활 덕분에 이 본질적 질문에 대한 답을 책에서 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의 세계를 만든 19세기의 역사를 읽었다. 수많은 인간이 겪었던 패배,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진전해온 민주주의의 역사는 내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로를 준 것은 바로 과학이었다.
수십만 년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지난 수 세기 만에 과학이 이뤄낸 뚜렷하고 엄청난 진보를, 부끄럽지만 40대가 되어서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무지와 야만에서 출발한 인류가 세계를 해석하고 바꾸는 방법을 어떻게 발견 또는 발명해 지금의 과학문명을 이룩했는지를 보며, 과학의 역사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과학이 가진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규칙들에 감동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학 역시, 자기만의 직관적 세계와 경험에 갇힌 불완전한 인간의 지적 활동이 지닌 여러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과학만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지적활동 일반이 갖고 있는 한계, 더 나아가 진화의 결과물로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숙명적 한계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과학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짚어 보며, 과학이 인간에게 던지는 의미, 위안에 관해 논한다.
2. 과학적 방법론과 인식론적 숙명
“우리는 모두 경험의 노예이다. 아무도 선입견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저 선입견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뿐이다.” (에드워드 머로) 2
1) 반증주의
과학이 다른 인간의 지적활동 분야들과 비교해 단시간에 놀라운 성과를 낸 비결은 무엇일까? 처음 과학에 관심을 두고 책을 읽으며 내가 이해한 비결은 단순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규칙이었다. “모든 가설을 실험과 관찰로 시험한다. 통과하면 받아들이고, 실패하면 버린다. 증거를 따라가고 모든 것을 회의한다.”
이 단순하고 아름다운 규칙을 가장 모범적으로 따른 사례는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그는 “천체의 운동은 신의 뜻에 따라 원”이어야만 한다는 자신의 신념체계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튀코 브라헤의 관측 결과 사이의 충돌에서, 결국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증거를 따랐다. (핸슨 1958, 세이건 1980) 3
이 규칙을 가장 논리적,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칼 포퍼였다.
“한 차례의 긍정적 결정은 다만 일시적으로 그 이론을 지지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뒤이어 내려진 부정적 결정들이 언제든지 그것을 뒤집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이 상세하고도 가혹한 검사들을 견뎌 내고 과학적 진보의 과정에서 다른 이론에 의해 대치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이 ‘원기를 증명했다’ 또는 그것이 과거의 경험에 의해 ‘용인되었다(corroborated)’고 말할 수 있다.” (칼 포퍼 1934 <과학적 발견의 논리>)
그는 귀납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오류를 피하는 방법을 훌륭하게 또는 교묘하게 제시했다. 더 나아가 모든 이론을 반증 가능성에 노출함으로써, 우리가 현재까지 쌓아올린 지식 체계를 도그마에 빠뜨리지 않는 미덕도 가르쳐 주었다. 그의 방법론은 당위의 측면에서 매우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포퍼의 반증주의는 내게 몇 가지 공백과 의문을 남겨 주었다. 애초에 가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관찰과 실험은 얼마나 믿을만한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든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이론인데도 불구하고 과학자는 어떻게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가 그것이었다.
2) 패러다임
20세기의 가장 논쟁적인 저자 중 하나인 토머스 쿤은 과학이 규범과 당위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을 시사해주었다. 과학자 역시 개인의 경험과 한 시대가 가진 시공간 속에 뚜렷한 한계를 지닌 인간이다. 그가 제시한 ‘패러다임’이라는 세계관의 틀은, 포퍼가 남긴 마지막 의문, 즉 과학자가 어떻게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이론적 확신에 근거해 전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역사적, 경험적 답변을 제시해주었다.
인간은 저마다의 경험과 가치관을 반영한 ‘세계관’의 틀 속에서 세계를 인식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왜곡을 동반하지만, 역설적으로 ‘세계관’이 없다면 세계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패러다임’ 없이는 가설을 세우는 것도, 가설에 대한 실험적 검증도 불가능하다. 순수한 백지상태의 ‘합리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패러다임’이 곧 ‘도그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때로는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한 세대가 걸리기도 하지만, 과학자 공동체는 계속해서 새로운 패러다임들로 개종해왔다. 더욱이 이 개종은 과학자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토머스 쿤 1962 <과학혁명의 구조>)
쿤은 인식 주체로서 인간이 지닌 역사적, 진화적 한계를 드러내 주었지만, 동시에 그 나름 인간이 지닌 ‘합리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를 –우호적이든 비판적이든- 상대주의자로 규정하려는 모든 논쟁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1969년 덧붙인 후기를 보면 그는 과학의 ‘진보’를 그만의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목적지가 뚜렷한 ‘존재론적 발전의 방향’을 부인했을 뿐이다. 그 점은 내가 이해한 포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맥락에서 나는 쿤과 포퍼 사이의 화해 지점을 찾는 시도가 가능하고 의미 있다고 본다.
3) 소결
저널리스트로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진실 추구, 공정성, 객관성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의 ‘객관’과 너의 ‘객관’이 다르다는 점, 관찰과 기록을 하는 기자 스스로가 사실은 경험과 자신만의 세계관에 갇힌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늘 직업적으로 안고 살아야 할 숙명적 고통이었다.
과학철학의 주요 논쟁들을 읽으며 나는 유사성 발견을 넘어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하물며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일 것만 같던 과학조차 이런 본질적 논쟁을 안고 있었다. 저 너머 어딘가에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을 손에 움켜쥘 수 있다는 자기 확신과, 나 자신이 경험과 역사 속에 갇혀 선입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겸허함. 이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어쩌면 숙명적 고통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운 특권일지 모른다.
3. 진화론과 과학의 확장
“우리 인간이 생물계의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비록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모든 숭고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의 뼈 마디마디에는 비천한 기원을 나타내는 지울 수 없는 도장 자국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찰스 다윈 1871 <인간의 유래>)
1) 생명의 나무
“나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오랫동안 철학과 종교가 독점해온 이 존재론적 질문에 처음으로 과학적 해답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나에게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가장 혁명적인 과학 이론이다. 자연선택 이론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더 나아가 그것이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를 확고하게 변방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인류는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데 이어, ‘인간이 생명의 정점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에서 뻗어 나간 가지 끝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은 인식론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다. 나 자신의 객관적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나에게 매우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논점들을 던져주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논리 전개로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이런 질문을 제기했다. “내가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면 나의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유전자의 명령으로부터 뇌의 활동, 의식이 획득한 상대적 자율성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2) 인간에 새겨진 비천한 주홍 글씨
진화에는 목적지가 없다. 변이, 수많은 우연적 사건, 상상할 수 없는 지질학적 규모의 시간, 그리고 자연선택이 진화를 이끈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계획된 결과물을 제조하기 위한 설계도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 인간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인간에게는 다윈이 말했듯 그 비천한 기원의 자국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칼 세이건은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1978년 저서 <에덴의 용>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가 종합한 당시까지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뇌에는 파충류로 진화할 때 처음 생겨난 R 복합체라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 영역은 공격적 행동, 영토 본능, 서열 형성, 주어진 관습을 그대로 따르는 행동양식을 담당한다. 변연계는 포유류로 진화하며 등장한 영역이다. 이타적 행동, 체온을 나누고 새끼를 돌보는 능력을 담당한다. 즉 인간 행동에서 관습적, 관료제적 행동, 서열 형성, 공격적 행동은 모두 수억 년 전 파충류 시절부터 새겨져 있던 우리의 일부이다.
인간은 내가 기대했듯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만은 아니었다. 나의 뇌 속에는 대뇌피질이 담당하는 이성, 논리력, 비판의식뿐만 아니라, 공격성과 성욕,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를 짓밟는 관습적, 위계적 본능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문명을 이룩해온 역사는 대뇌피질과 R 복합체 사이 투쟁의 역사인지 모른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한 위로이다. 우리 자신을 잘 알게 되면 인간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 인류가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서 밀어냄으로써 세계에 대한 더욱 정확한 이해와 변화의 능력을 만들어낸 것처럼,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출발점이다. 진화론은 나의 비천한 기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역설적으로 희망임을 알려주었다. 5
3) 윤리적 실천
험악하고 비열해 보이는 이 세계에서 나는 과연 이타적으로 행동하거나 타인과 협력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에게 오랫동안 철학적, 도덕적 범주의 것이었다.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는 그 범주를 깨뜨렸다. ‘팃포탯’ 전략이 지닌 놀라운 성공 가능성과 안정성은, 성공의 비결이 상대를 짓누르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협력을 끌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연구가 나에게 던진 의미는 그 명제의 근거를 윤리와 도덕에서가 아니라 정교한 수학적 확률 계산과 반복적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끌어냈다는 점이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개정판을 통해 생명의 진화에서 협력과 이타성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팃포탯’ 개념을 빌려 보완했다. 인간 자신에 대한 과학적, 진화론적 이해가 깊어진다면, 윤리와 도덕적 실천의 근거마저 과학이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른다.
4. 과제를 남기는 결론
“물리학 분야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필적할 만큼 훌륭하고 정연한 가설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실험과의 대결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지 못했기에 물리학의 세계에서 거부당하고 사라졌다. 나는 만일 그와 같이 실험을 거쳐 살아남지 못하는 가설은 모두 솎아내 버리는 관행을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삶에도 통상적으로 적용하게 된다면 우리의 인간 조건은 크게 개선될 것으로 생각한다.” (칼 세이건 1977 <에덴의 용>)
현대 문명과 사회, 인간을 이해하려면 과학을 알아야 한다. 과학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당연한 무언가가 아니다.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자연, 그리고 자신의 한계와 맞서 쌓아올린 방대한 지식체계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제 걸음마를 떼었을 뿐이다.
나에게는 수많은 질문이 남아 있다. 과학 이론들의 구조는 실재하는 세계가 품고 있는 구조의 반영인가, 아니면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 의식 속의 특징인가? 과학은 자연에 숨겨진 비밀을 궁극적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적 방법론을 과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불가능하다면 무엇이 그것을 막고 있는가? 과학은 윤리적, 도덕적 실천에도 답을 줄 수 있는가?
과학은 어쩌면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얻은 적응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부산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 과학이 아니듯, 과학의 존재 목적 역시 인간을 위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을 다른 모든 종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특징이다. 과학은 분명히 나에게, 그리고 인류라는 종에 속한 모든 개체에게 특별한 선물이자 위로이다.
과학은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동시에, 진화적, 역사적, 경험적 한계에 갇힌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숙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역설적으로 과학의 이러한 한계는 나에게 위안을 준다. 인간은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작은 존재라는 사실이 주는 겸허함. 인간의 인식 행위가 갖는 한계와 지금의 ‘진리’가 잠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겸허함. 그 겸허함을 바탕으로 한계를 두드리고 확장하려는 도전으로서의 과학. 과학의 이런 매력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나 자신과 주변 인간, 그리고 세상에 대해 더 넓고 너그러운 시야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굴드, 스티븐 제이 1996 <풀 하우스> 이명희 옮김 2002 사이언스북스
다윈, 찰스 1871 <종의 기원> 송철용 옮김 2013 동서문화사
도킨스, 리처드 1976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 이상임 옮김 2010 을유문화사
도킨스, 리처드 1986 <눈먼 시계공> 이용철 옮김 2004 사이언스북스
라카토슈, 임레 1978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신중섭 옮김 2002 대유학술총서
버스, 데이비드 1999 <진화심리학> 이충호 옮김 2012 웅진지식하우스
세이건, 칼 1977 <에덴의 용> 임지원 옮김 2006 사이언스북스
세이건, 칼 1980 <코스모스> 홍승수 옮김 2006 사이언스북스
액설로드, 로버트 1984 <협력의 진화> 이경식 옮김 2009 시스테마
윌슨, 에드워드 1999 <통섭> 최재천, 장대익 옮김 2005 사이언스북스
장대익 2007 <진화론도 진화한다> 김영사
장대익 2008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김영사
쿤, 토머스 1962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 홍성욱 옮김 2013 까치
포퍼, 칼 1934 <과학적 발견의 논리> 박우석 옮김 1994 고려원
핸슨, 노드 러셀 1958 <과학적 발견의 패턴> 송진웅, 조숙경 옮김 1995 민음사
- 2012년 상반기에는 MBC에 이어 공영 언론인 KBS, YTN, 연합뉴스 노조가 ‘공정보도’를 요구하는 파업을 했다. 가장 길었던 MBC 파업 사건에서 1, 2심 재판부는 모두 ‘파업의 목적과 수단 모두 정당하며, 해고와 징계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본문으로]
- 에드워드 머로는 미국 CBS의 전설적인 기자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맞서 CBS 프로그램 “See It Now”에서 지속해서 진실을 보도해 청문회를 끌어냈다. 조지 클루니가 연출한 영화
의 실제 모델이다. [본문으로] - 케플러가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화성 궤도의 모델을 만들면서 원을 포기하고 처음 찾은 것이 타원이 아닌 달걀 모양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그에게 행성 궤도에서 두 개의 초점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태양은 궤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초점에 있어야만 한다는 그의 믿음을 버리기까지의 지난한 고뇌의 과정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본문으로]
- 스티븐 제이 굴드는 <풀 하우스>에서 취객이 술집에서 나와 비틀거리는 예를 보여주며, 한쪽 끝이 ‘단세포 생물’이라는 벽에 막혀 있을 때 변이의 증가가 어떻게 방향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그러나 진화가 정말 ‘진보’가 아닌지는 ‘진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인다. 존재론적 방향성이 없다는 의미에서 진화는 진보가 아니지만, 다양성과 복잡성, 조직화의 정도가 증가한다는 의미에서 진화는 진보이기도 하다. 과학의 ‘진보’ 문제도 비슷하다. [본문으로]
- 이런 의미에서 진화심리학은 나에게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흥미롭고 실천적인 학문이라고 느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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