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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별을 볼까?

오리온자리를 겨누고 있는 나의 첫 천체망원경


1. 오래된 로맨스 


"왜 별을 보느냐고? 안 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아니야?" 

- 경북대 박명구 교수 (한겨레신문 인터뷰 중) 


수백, 수천 개의 별이 까만 밤 하늘 전체를 뒤덮고 반짝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는가? 있다면 언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이 쏟아지는 하늘은 절대 일상이 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것은 '로맨스'이다. 

지난 9월 나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원 하나를 이뤘다. 아이 생일 선물을 핑계로 생애 처음으로 천체망원경을 샀다. 구경 90mm 굴절망원경. 아마추어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초보적 수준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이 녀석 물건이다. 나는 망원경에게 말을 건다. "지금 네가 있는 장소와 시간은 이거야" (경위도, 날짜, 시각 입력)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별은 이거야"(정렬) 그러면 이 녀석은 우주 전체를 품 안으로 들이는 엄청난 괴물로 변신한다. 별이나 성단, 성운, 은하의 이름을 알려주면, 내장된 컴퓨터가 자동으로 모터를 움직여 그 대상을 겨눈다. 

자본주의는 정말 경이롭고 무섭다. 작은 플라스틱 카드로 몇십만 원 남짓 결제하는 단순한 행위 한 번이면,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던 가장 뛰어난 천체관측 도구보다 수백 배 뛰어난 나만의 천문대를 가질 수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쓰던 망원경은 광학 성능만 보면 내 망원경의 1/5 수준이다. 자동추적? 꿈도 못 꿨다. 그는 그 조악한 망원경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몇 년을 궁리하고 고생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 4개를 찾아냈고, 은하수가 사실은 수많은 빽빽한 별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었겠지만, 그 수준의 망원경을 21세기 현재 구매 가능한 부품들로 조립한다고 가정하면(그런 수고를 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단돈 6만 원이라고 한다. 엄청난 자산을 소유한 귀족들의 취미였던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 관측은, 이제 중학생들도 갖고 노는 장난감이 되었다.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인류 전체의 지식을 다수가 공유하거나, 정교한 상품을 대량생산 체제로 싼값에 공급하는 능력에 관한 한, 아직 자본주의만 한 놈은 없다. 

이 경이로운 장난감으로, 이제 별을 보러 나갈 차례다.



2. 별 볼 일 없으니까…. 


누군가 내게 "전형적인 머리형 인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반박할 수 없었다. 무슨 취미를 시작하든, 내가 가장 처음 하는 일은 관련 서적 탐독이다. 자전거를 타든, 중량 운동을 하든, 등산하든, 별을 관측하든, 요리하든 우선 책부터 읽는다. 천체 관측 서적 4권을 주문해 먼저 탐독했다. 늘 별을 동경했지만 정작 별자리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추어 천문동호회 카페에도 가입해 며칠을 공부했다. 무림에는 정말 숨은 고수들이 가득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몇 차례에 걸쳐 예행연습도 했다. 

기상청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며 택일을 준비하던 어느 가을 주말 밤, 카페에 번개 공지 글이 떴다. 경기도 양평 벗고개. 말이 양평이지, 사실 강원도 문막과 경계에 있는 먼 곳이다. 수도권 5대 관측지 가운데 한 곳이다. 이날 낮부터 애들을 빡빡하게 굴렸다. 그리고 저녁 8시 30분 애들을 재우는 데 성공하고 부인의 허락을 얻어냈다. 

밤 10시 별빛 외에는 전혀 불빛이 없는 깜깜한 산 중턱 도로에, 사람이라고는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40대 아저씨들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책읽는인간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베텔교수입니다." 이름도 모른다. 직업도 모른다. 나이도 모른다. 서로의 닉네임만 교환하고 우리는 망원경 아이피스에 눈을 갖다 댄다. 왜 40대 남자들이 별을 볼까? 

내 후배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별 볼 일 없으니까…." 갑자기 짠해졌다. 왠지 모를 슬픔이 엄습한다. 



3. 강렬한 시신경 자극 


천체망원경으로는 별을 보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별은 이론적으로 무한대 거리에 있다. 우리 태양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별은 프록시마 센타우루스인데, 이 녀석까지의 거리가 4.2광년이다. 어차피 감이 안 오지만 굳이 Km 단위로 환산하면 40조Km 정도다. 무한대는 아무리 망원경으로 당겨 봐야 그냥 무한대다. 즉, 점으로 보이는 별은 망원경으로 봐도 그냥 점이라는 뜻이다. 그럼 뭘 볼까?

망원경으로 주로 보는 천체는 별이 무리 지어 있는 성단, 별이 새로 태어나고 있는 가스구름인 성운, 그리고 우리 은하 바깥의 엄청나게 큰 별의 무리인 외부 은하들이다. (달과 행성들은 별이 아니다. 얘들은 같은 태양계에 있어서 가깝고, 따라서 망원경으로 보면 실제로 형태가 크게 보인다. 가깝다고 해봐야 우리의 경험적 감각으로 가늠할 수 없는 거리지만.) 

이날 밤 나는 경이로운 하늘을 경험했다. 수없이 쏟아지는 반짝이는 별과 책에서 익힌 별자리들은 그저 바닥에 누워 맨눈으로 보기만 해도 감동적이었다. 망원경을 들이대면 눈으로 볼 수 없던 수많은 이름 없는 별들과 성단, 성운, 은하가 나의 망막으로 쏟아져 들어와 시신경을 흥분시킨다. 새벽 2시쯤 철수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나는 별에 빠져 새벽 5시까지 홀딱 밤을 새우고 말았다. 드디어 내 망원경으로 별을 보았다는 벅찬 감동과 함께, 새벽녘 6번 국도에서 찍힌 과속 카메라 사진과 과태료 통지서도 며칠 뒤 보너스로 받았다.


안드로메다 은하가 보이는 가을 은하수



4. 왜 별을 보는가? 


왜 인간은 별을 동경할까? 그건 너무도 분명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인류 진화 역사 수백만 년 가운데 전기를 대규모로 사용한 최근 수십 년을 제외하면, 인류가 밤에 볼 수 있던 빛은 (스스로 사용법을 익힌 불을 제외하고는) 별뿐이었다. 별은 인류의 오래된 일상이다. 고된 사냥과 채집을 마치고 해가 지면, 그들은 화롯가에 둘러앉아 함께 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인간의 조상들은 별과 자기 자신의 기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만들고, 별에게 소망을 빌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로, 또 그다음 세대로, 그렇게 수천 세대에 걸쳐 그 이야기와 소망을 전해왔다. 그 역사는 우리 유전자 안에 깊이 각인돼있다. 인간이 갖춰야 할 진화적 특성들, 즉 이성적 사유, 상상력, 꿈, 언어는 모두 별과 함께 성장한 것이다. 

둘째,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소가 태어난 곳이 바로 별이다. 별은 수소 핵융합 반응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헬륨을 만들어낸다. 온도와 압력이 높아지면 핵융합 반응이 가속화돼 탄소, 산소, 규소, 니켈, 철 같은 무거운 원소들도 차례로 만들어낸다. 별은 모든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용광로인 셈이다. 어떤 별은 그 온도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해 자기가 만들어낸 이 무거운 원소들을 우주 공간 곳곳에 흩어놓는다. 초신성 폭발로 흩어진 원소들이 바로 지구와 같은 행성의 재료이자,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재료이다. 우리 모두의 고향은 (수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별이다. 

별이 만들어낸 물질의 재조합으로 탄생한 인간이 별을 동경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류는 언제나 자신의 고향인 별과 그 별의 고향인 우주의 기원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의 기원에 대해 질문해왔다. 이제 인류는 이 질문에 대해 처음으로 창조주를 끌어들이지 않은 답을 내놓고 있다. 우주에서 태어난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가, 어느새 자신의 기원을 우주 탄생의 결정적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식의 주체로 성장했다. 이제 인류는 자신의 고향인 별을 보며 우주의 비밀을 풀어가고 있다. 별에 대한 우리 모두의 로맨스는 '필연'이다. 그 본질은 노스탤지어다.



5. 별에서 배운다. 


"우리는 모두 경험의 노예이다. 아무도 선입견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저 선입견이 있다는 걸 알아챌 뿐이다." 

- 에드워드 머로 (미국 CBS의 전설적 기자,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의 모델) 


인류는 진보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인류가 진보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역사다. 수천 년을 지속해온 노예제도가 불과 지난 200년 사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실존하는 개인의 구체성을 가진 삶의 문제로 이 질문이 닥치면, 전혀 다르다. 인류가 경향적으로 진보할지는 몰라도, 내가 사는 당대에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역사가 진보할 것이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한 헌신은 당대에 보상받는가? 특히나 역사적으로 후퇴하고 있는 특정 시기(바로 지금 같은)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한 인간에게, 답변은 매우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삶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100년을 채 못 살다 가는 존재가 수 세기, 수십 세기에 걸친 진보를 경험으로 체감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물며 수십 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나, 137억 년간 이어진 우주의 팽창은 감히 그 끝자락의 털 하나도 느끼기 어렵다.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다윈의 책이 당대에 그토록 큰 저항에 부딪혔던 이유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경험에 바탕을 둔 자기만의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이나, 미시세계의 법칙인 양자역학 수준으로 오면, 21세기를 사는 나도 머리가 어지럽다. 이것이 진리 탐구의 근본적 한계다.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한, 그 주체의 경험은 늘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내가 불가지론자는 아니다. 인식 주체인 인간을 끊임없이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어내려는 치열한 노력은, 불완전하지만 늘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우리를 이끌어 준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변방이었다는 혁명적 발상, 인간은 신이 창조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명과 전혀 다를 것 없는 35억 년 진화의 거대한 나무의 잔가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이 근대 과학혁명을 열었다. 나 자신을 끝없이 중심에서 끌어내리려는 겸허한 노력만이, 우리를 경험의 노예에서 해방하고 탐구자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나에게 불가능하지만 중단없이 지향해야 할 숙명과 같은 가치이다.


2014년 10월 3일 책읽는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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