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춘천에서 양구까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취재원에게 연락이 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별이 많이 보이는 곳을 찾았다며 오라고 한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국립DMZ자생식물원이다. 마다할 리가 없다. 달 없고 날씨 맑은 금요일을 골라 휴가를 냈다. 운전 오래 할 각오를 하고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안 막히면 2시간 반이란다. 의심스러웠다. 양구까지 2시간 반이라니.
시를 쓰던 선배가 있었다. 그는 양구에서 군 생활을 했다. 20여 년 전 그가 내게 읊어준 시의 제목은 "춘천에서 양구까지"였다. 길이 워낙 꼬불꼬불 험해 그는 이 길을 창자에 비유했다. 물론 시는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구글이 있다.
<춘천에서 양구까지>
- 쉬지 말고 따라가라
똥은
구불구불 그 창자를
묵묵히 다 지내오기에
세상의 거름이 될 수 있는 걸까
춘천에서 양구까지
소양호 따라 가는 길
바로 옆 건너편
눈에 닿을 듯한 그 곳을
버스는 돌아 돌아 힘겹게
힘겹게
발을 디딘다.
똥은
구불구불 그 창자를
다 지내오기에
제 몸에 배인 더러움에도
태연할 수 있는 걸까
비틀거리는 버스
비위 약한 어른들은 멀미를 하고
어린애들은
젖냄새 나는 토사를 쏟아낸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참으며 그 먼 길을 따라간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언젠가는 직선도로가 뚫린다는
기쁜 소식 있으리
그 길 놓기 위해
수만 대의 차량들
묵묵히 이 굽은 길을
달게
달려야 하리라.
김기태
양구라는 말에 곧장 이 시가 떠올랐으니 2시간 반이라는 말을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금요일 오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춘천을 지나 국도로 접어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춘천에서 양구까지" 꼬불꼬불한 길이 나를 기다리겠지. 조금 설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엄청난 길이의 터널이 뚫렸다. 배후령 터널이다. 2012년 12월 완공된 길이 5.1Km, 국내 최장 터널이다. 춘천에서 화천 지나 양구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험하고 사고 잦기로 유명하던 배후령 길은 이제 사라졌다. "똥이 구불구불 다 지내와 세상의 거름이 될 수 있었던" 그 창자는 사라졌다. 곡선의 낭만은 사라졌고, 모든 것이 직선으로 바뀌었다. 선배가 시에 쓴 "직선도로"는 조금 다른 의미의 비유였겠지만, 나는 서운했다.
목적지 마을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은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도솔령이라는 고개였다. 여기에도 터널이 뚫려 꼬불꼬불한 옛 도솔령 길은 사라졌다. 집에서 목적지까지 정확히 2시간 반 걸렸다.
2. 펀치볼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비무장지대 철책을 바로 맞대고 있는 민간인통제선 너머 마을이다. 사진에서 보듯 동서남북이 모두 해발 1,100~1,400미터의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 대암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한국전쟁 격전지 가운데 한 곳인데, 당시 가칠봉에서 마을을 내려본 외국 종군기자가 화채 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펀치볼(Punch Bowl)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요즘 둘레길 열풍이 이곳에도 불어 DMZ 둘레길 조성 사업이 한창인 것 같다.
마을에서 올려다본 북쪽 산 능선은 모두 철책이다. 날씨 좋은 날에는 마을 뒷산 정상에서 금강산 줄기가 보인다고 한다. 별 사진 촬영할 만한 탁 트인 곳을 찾아 마을을 답사하는데, 왠지 이 마을이 낯설지가 않다. 언젠가 한 번 와봤던 곳 같다. 두뇌 한켠에 숨어있던 기억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99년 2월, 나는 혹독하고 길었던 수습 기간을 마치고 첫발을 내디딘 사회부 2년차 기자였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따뜻한 시선과 냉철한 이성을 함께 가진 나만의 기사를 쓰고 싶었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대인지뢰 민간인 피해자 문제를 취재해보자고 했다.
1997년 노벨평화상은 세계대인지뢰 대책회의, ICBL에게 주어졌다. 대인지뢰는 일명 발목지뢰라고도 한다. 큰 전차를 폭삭 주저앉게 하는 대전차지뢰와 달리, 대인지뢰는 사람이 밟으면 발목만 잘라낸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지뢰라 금속탐지기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한때 전쟁터였던 캄보디아 같은 곳에서는 지금도 민간인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고, 특히 어린이들이 갖고 놀다 폭발하는 사고도 꽤 자주 일어난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이 무식함 때문에 대표적인 비인도적 무기이다.
미국 여성 조디 윌리엄스가 만든 민간단체 ICBL의 노력에 힘 입어 대인지뢰 금지협약에는 세계 133개국이 동참했다. 일명 오타와 협약이다. 오타와 협약은 1997년 12월 체결돼 1999년 3월 1일 자로 발효됐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한국, 북한 등이 이 협약을 거부했다. 미국이 가입을 거부한 명분은 한반도였다. DMZ에는 2백만 개의 대인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지역에도 상당히 많이 매설됐지만, 정부는 정확한 지역과 매설량을 공개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정부도 정확히 모른다.
강원도 양구로 취재를 떠났다. 춘천을 지나 구불구불한 고개를 몇 개나 넘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고개를 넘을 때 민간인통제선에서 군의 검문이 있었다. 취재목적을 솔직히 밝히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취재 자체가 막힐 테니까. 민통선 지역 생태계와 환경 취재라고 둘러댔던 것 같다. 그렇게 서울에서 차로 5시간이 걸려 도착한 마을의 이름이 <해안면>이었다.
지난여름 밭일 하고 개울에서 몸을 씻다 장마에 떠내려온 대인지뢰에 발목을 잃은 아주머니, 나물 캐러 뒷산에 갔다가 지뢰를 밟은 할머니를 만났다. 피해 보상? 꿈도 못 꾸고 있었다. 민통선 너머 마을 사람들에게는 법보다 무서운 것이 군부대인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재수없게' 지뢰를 밟은 사람들은 1천 명을 헤아릴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공식 입장은 기가 막혔다. "민간인 지뢰 피해자는 없다."
그렇게 취재한 기사는 오타와 협약 발효를 며칠 앞두고 뉴스데스크에 <집중취재> 타이틀을 달고 방송됐다. 대인지뢰 민간인 피해자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낸 기사였다.
16년 만에 다시 그 기억이 살아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 별에 이끌려, 나는 16년 전 그곳에 서 있었다.
3. 쏟아지는 별빛
그날 저녁 식물원 원장님과 연구원들, 그리고 해안마을 주민 몇 분과 함께 식사했다. 주민분들에게 16년 전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리고 구글링으로 당시 기사 동영상을 찾아 보여드렸다. 기사 속 주인공들을 알아보셨다. 지금은 모두 마을을 떠나고 없다고 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덧붙이셨다. "기자님은 저 때보다 지금이 더 잘생겼네요."
오래전 내가 쓴 기사를 다시 보는 일은 편하지 않다. 패기와 열정은 지금보다 훨씬 컸겠지만, 기사는 못 썼고, 얼굴은 촌스럽고, 오디오는 쫓기듯 숨 가쁘다. 그러나 무엇보다 편하지 않은 것은 그 기사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성찰할 때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미리 봐둔 곳에 장비를 폈다. 낮에 몰려오던 구름은 어둠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별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빛이라고는 없는 곳이다. 마을에서 올라오는 작은 불빛, 그리고 철책선을 따라 산 능선에 켜진 불빛이 전부이다. 미세먼지 농도가 꽤 높은 편이었는데도, 서울 근교의 하늘과는 차원이 달랐다.
식물원 연구원들이 관측지로 찾아 왔다. 봄철 별자리를 설명해주고, 천체망원경으로 관측도 도와주었다. 그들이 돌아간 뒤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사진 촬영을 걸어 놓고 별을 보면서도 16년 전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 기사가 나온 뒤 국회가 처음으로 대인지뢰 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강원도 등 지자체들의 실태 조사도 시작됐다. 2003년 처음으로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이 [대인지뢰 제거 및 피해자 보상 특별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정부, 특히 국방부의 반대가 심했다. 법안 발의, 정부 반대, 회기 종료, 법안 폐기. 수많은 법안이 이런 식으로 사장된다. 이 법안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조사 결과 강원도에만 200명 넘는 생존 피해자가 있었다. 그러나 보상은 먼 얘기였다.
내 기사로 세상이 조금은 더 좋아졌을까? 기자라면 누구나 던져본 자문일 것이다. 이 직업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된 지금, 이 질문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잡념이 많으면 일을 망친다. 덕분에 이날 촬영한 사진들은 모두 엉망이다. 수평을 맞추는 작은 절차 하나 빼먹은 결과 별 추적에 실패해 몇 장 못 건졌다. 이 아름다운 두 대상은 다음에 다시 도전해야겠다.
M101 <큰곰자리 바람개비 은하>
<외뿔소자리 장미성운>
4. 여행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인터넷을 뒤졌다. 아래과 같은 기사를 찾았다. 특별법이 지난해 가을 국회에서 통과됐다. 지뢰 제거 문제는 법에서 빠졌고, 배상이나 보상이 아닌 위로금 형식의 '지원'이지만 어쨌든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 법은 올해 4월 16일부터 발효된다. 공교롭게도 세월호가 침몰한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래서 이 직업, 쉽게 포기하기도 어렵다. 다시 무겁게 묻는다. 내 기사로 세상이 조금은 더 좋아졌을까?
<'민간인 지뢰피해자 숙원 풀렸다'…특별법 국회 통과>
2014-10-01 13:53
지뢰 피해자 지원특별법 휴전 후 61년 만에 첫 제정
(춘천=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선 주변에서 지뢰폭발 사고를 당했던 민간인들을 지원할 수 있는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강원과 경기 접경지역 주민들의 숙원이었던 '지뢰피해자지원 특별법'이 제정된 것은 지난 1953년 휴전 이후 61년 만이다.
국회는 지난 달 30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철원·화천·양구·인제)이 대표 발의한 지뢰피해자지원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 특별법은 지뢰 피해자와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다친 사람에게는 의료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피해자와 유족 지원을 위해 국방부 장관 산하에 피해자 지원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비영리법인이나 단체에 사업비 일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지뢰 피해자 314명을 지원하는 데는 80억원 가량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뢰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은 지난 2003년부터 여러 차례 발의됐으나 관계 부처 간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매번 자동 폐기됐었다. 이번에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지뢰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됐던 민간인들이 직면한 생계 위협, 가정 파탄, 가난 등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 의원은 "그동안 지뢰 피해자와 가족들은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빚에 허덕이고, 국가배상청구권 제도를 알지 못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라도 특별법이 통과된 것은 지난 60여 년 동안 온갖 희생과 고통을 감내한 접경지역 주민들의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지뢰 피해자 지원활동을 벌여온 평화나눔회(옛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지난 2011년 강원 지역을 대상으로 피해자를 조사한 결과 6·25전쟁 이후 휴전선과 군부대 주변에 매설된 대인지뢰, 대전차지뢰 등으로 피해를 본 민간인은 228명으로 집계됐다. 민간인들은 6·25전쟁 이후 방치됐던 농경지를 개척하거나 산나물을 뜯으러 갔다 주로 사고를 당했다.
조재국 평화나눔회 이사장은 "지뢰 피해자들이 고령화로 점점 생존자가 줄어가는 상황에서 지난 16회 국회에 처음 발의를 시작한 지 11년 만에 피해자들의 숙원이 풀렸다"고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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