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육체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나는 당시 육신의 쾌락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 그리스인 조르바 中
내가 그랬다. 스무 살 무렵 신을 지워버리고 자신을 스스로 유물론자, 무신론자로 선언한 이후에도 여전히 내게 육체는 정신보다 수준이 낮은 무언가였다. 몸을 돌보거나 꾸미는 행위 일반이 내게는 눈에 거슬리고 천박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나는 이렇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육체를 깔보는 시각이, 먹물 근성을 벗지 못한 나약함에서 비롯된 허위의식이라는 점을 희미하게 자각하고 있었고 부끄러움마저 있었다. 게다가 육체의 쾌락이나 아름다움, 강함을 좇는 주변 친구들에 대해 절대 드러내서는 안될 은밀한 동경마저 갖고 있었다. 이런 심각한 이중성은 언젠가는 격변을 겪기 마련이다.
2년 전 여름 군대 제대 이후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육체 운동을 시작했다. 무거운 것을 들거나, 뛰는 가장 원초적인 운동이었다. 처음 시작한 동기는 단순했다. "시간이 많아졌으니 몸이나 좀 돌보자"
몇 달 동안 재미도 좀 붙나 했지만 번번이 아무 변화 없는 몸에 실망하곤 했다. 하긴 20년 가까이 술과 담배, 불규칙하고 부족한 수면으로 혹사해놓고, 고작 몇 달 투자해 몸이 화답해주길 기대한 게 잘못이다.
중단하지 않고 무식하게 밀어붙인 결과 이제 운동을 즐기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난주 나는 처음으로 데드리프트 100kg 5회, 스쿼트 90kg 7회에 성공했다. 이 두 운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장 원초적인 운동이다. 왜냐하면, 이 두 운동만큼 사람을 겁먹게 하고, 긴장하게 하며, 순간의 짜릿함을 주는 운동이 없기 때문이다.
100kg, 내 몸무게의 거의 1.5배에 달하는 쇳덩어리가 내 앞에 놓여있다. 과연 들 수 있을까? 만약 딸려 올라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냥 던져버리나? 긴장감에 살짝 심장이 조여오고, 나는 두 손으로 바를 몇 번씩 자세를 고쳐가며 꽉 동여 잡는다. 호흡을 가다듬은 뒤, 하체에 힘을 주고 발바닥으로 지구 전체를 밀어내며 그 자석 같은 단단한 쇳덩어리를 지구로부터 떼어낸다. 딸려온다. 오!!! 딸려온다. 그때 그 희열과 짜릿함. 이게 이 무식하고 단순한 중량운동의 매력이다. 보이는 근육, 근비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힘을 키우는 스트렝스 위주의 운동을 한 자는 근육이 얼마나 커졌는지에 큰 관심이 없다. 내가 몇 kg를 들 수 있게 됐는지가 최대 관심사다. 그런 점에서 지난주는 기념비적인 한 주였다.
2. 영혼을 팽개치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기념비를 세우고 단단해진 나의 힘을 스스로 대견해 하던 바로 지난 주말, 나는 앓아누웠다.
아침부터 39도에 육박하는 고열과 극심한 두통으로 꼼짝하기 어려워졌다. 간신히 힘을 내 동네 병원을 갔는데 증상을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뇌수막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 바로 머리 뒤에는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팔과 다리가 잘린 두 젊은이의 사진과 함께 이렇게 쓰여있었다. "20살 태웅 군은 어느 날 갑자기 고열이 나기 시작한 지 48시간 뒤 팔과 다리를 잘라야 했습니다. 세균성 뇌수막염, 무서운 병입니다."
무서운 괴력을 발휘해 택시를 잡아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열은 여전히 39도. 수액과 해열제 링거부터 맞고 혈액과 소변 검사를 했다. 2시간 뒤 결과가 나왔다. 백혈구 수치는 정상이었다. 다행히 그 무섭다던 세균성 뇌수막염은 배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급실 젊은 의사는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으로 추정된다며 내게 물었다. "최근 과로하셨죠?"
순간 데드리프트 100kg, 스쿼트 90kg이 떠올랐다. 그러나 난 긍정할 수 없었다. 이건 자존심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했다. "아뇨. 뭐 특별히…."
무균성 뇌수막염은 치료제가 없다. 7-10일이면 저절로 낫는단다. 타이레놀만 잔뜩 처방받았다.
나흘이 지난 지금도 열과 두통이 남아있다. 어제는 괴로워서 동네 내과에 가서 추가로 처방을 받았다. 의사가 대뜸 물었다. "과로하셨죠?" "아뇨. 뭐 특별히…." 처방전은 화려했다. 타이레놀과 부루펜 정 동시처방, 다이아제팜이라는 진정제, 소화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띈 이상한 약, 바로 유트로게스탄 연질캡슐이라는 약이었다. 저녁에만 처방됐다. 약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검색을 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유트로게스탄은 여성의 몸에서 분비되는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제였다.
프로게스테론은 황체 호르몬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착상 직후 추가 배란을 막고 황체를 형성해 착상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보통 난임 치료에 이 호르몬제를 처방한다. 난 남자인데, 왜 내게 이 약을 처방했을까? 참을 수 없는 궁금증과 불안함에 인터넷을 더 뒤졌다. 단서는 찾았다. 프로게스테론의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이 졸음과 나른함이었다. 임신 초기 여성들이 졸음과 나른함을 참기 어려운 것도 이 호르몬의 분비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저녁에만 이 약을 처방한 것으로 미뤄, 푹 자라는 뜻으로 수면제 대용으로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3. Less is more
있음(운동)만 볼 수 있는 우리에게 없음(휴식)을 알려주고, 인위적인 것(머신)보다는 자연스러움(프리 웨이트)이 훨씬 더 뛰어남을 강조하고, 그리고 화려함보다는 단순함을 좇으라고 말했던 그의 사상은…. (후략)
- <남자는 힘이다> 맛스타드림 지음
내가 그동안 탐독한 운동 관련 서적 10여 권 중 으뜸으로 꼽는 책이 있다. <남자는 힘이다> 저자는 딴지일보 시절부터 맛스타드림이라는 필명으로 주옥같은 글들을 남겨 온 익명의 필자다. 이 분이 바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근비대 운동이 아닌, 실전적 포스를 갖춘스트렝스(힘) 위주의 운동이라는 나름의 철학을 내게 심어주신 분이다. 자신의 운동철학을 노자에게서 얻었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운동은 내게 여전히 보여주기 위한 도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근비대 위주의 화려한 운동은 거부했지만, 여전히 운동하는 나, 운동화 신고 청바지 입은 나는 "비록 지금 찌그러져 있지만 언젠가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때를 위해 갈고 닦고 있으며, 적어도 체력과 젊음만큼은 내가 앞서 있다"는 과시용 허위의식의 도구 말이다.
아파보니 알겠다. 나는 바뀐 것이 없는데 며칠 앓고 지나가며 몸이 약해지자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고 다른 사람 마주치기가 싫어진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내가 몸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쓰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내 동료 몇 명은 뇌수막염이라는 병명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거 얼라들이나 걸리는 병 아녜요?"라고 놀렸다. 의도치 않게 얻게 된 1주일의 휴식 기간이다. 이번 주 운동은 포기했다. 1주일에 10kg씩 중량을 올려가던 지난 몇 주, 사실 나는 지나쳤는지 모른다. 의사들이 일관되게 과로했냐고 물은 건 우연이 아니다. 어른은 잘 안 걸릴 병에 걸린 게 이상했던 거다. 과로해서 면역력이 약해진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다.
나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여전히 과시적이고 정신을 위한 도구로서 육체를 이용하려 했던 나를 이제 성찰하고 반성할 때가 됐다. 몸은 몸 그 자체로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고 달래줘야 한다. 있음만 보고 달려온 시간을 잠시 멈추고, 없음이 가진 의미를 음미할 테다. 나의 운동도, 운동화 신은 패션도 이제 제자리를 찾아 줘야 한다. 정신적 과시욕의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건강함의 가치를 지니도록 말이다.
2014년 9월 25일 책읽는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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