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아내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신경정신과 의사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오늘 82살의 나이로 영면에 들어갔다. <모자를...>이라는 제목은 은유가 아니다. 정말 뇌의 이상으로 인지 기능의 장애가 생겨 아내를 모자로 착각해 머리에 쓰려 한 음악교사의 이야기이다. 올리버 색스는 뇌질환자들의 기이하고 엄청난 이야기들 속에서 따뜻한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파고들었던 과학자이다.
그는 지난해 말 전이성 암을 진단받고 투병 중이었다. 그가 최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하는 칼럼은 삶의 가치와 죽음을 대하는 무신론자의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를 추모하는 뜻으로, 지난 8월 16일, 죽기 2주 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그의 마지막 글을 번역해보았다. 대충 급하게 한 초벌 발 번역이니 번역 실수는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안식일(Sabbath)
나의 어머니와 17명의 형제자매들은 교조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사진 속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야물커(유대인 전통복장-역주)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밤에 그 옷이 흘러내리면 잠에서 깼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 역시 엄격한 집안 출신이다. 부모님 모두 십계명의 4번째 서약(안식일은 성스럽게 지내라는)을 지켰는데, 안식일(Sabbath - 우리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은 Shabbos라고 한다)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 해서도 안 되고, 운전도 전화도 안 된다. 전등이나 난로를 켜는 것도 금지됐다. 우리 부모님은 의사여서 예외를 만들었다. 두 분은 전화기를 꺼놓거나 운전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환자를 보거나, 수술을 하거나, 아기를 받아야 할 때는 일 해야 했다.
우리는 런던 북서쪽 크리클우드의 아주 엄격한 유대인 공동체 마을에 살았다. 정육점, 빵집, 채소가게, 생선가게 모두 안식일에 문을 닫았고(유대인 안식일은 토요일 - 역주), 일요일 아침이 돼야 다시 열었다. 그들과 우리 이웃 모두가 우리 가족처럼 안식일을 지켰다.
금요일 점심때쯤 어머니는 외과의사로서의 정체성과 의복을 벗고 게필테피쉬(유대인 음식 - 역주)와 안식일 음식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 저녁 직전에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불꽃을 손으로 감싼 뒤 기도를 했다. 우리는 모두 깨끗한 안식일 옷을 입고 안식일의 첫 번째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아버지는 은으로 만든 술잔을 들어올려 축복의 기도, 키두쉬(유대교 안식일 기도 - 역주)를 올렸다.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아버지를 따라 성가를 불렀다.
토요일 아침, 세 형제와 나는 부모님을 따라 Walm 거리에 있는 크리클우드 시나고그(유대교회 - 역주)에 갔다. 이 교회는 1930년대에 크리클우드 동쪽 끝에 사는 유대인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큰 건물이었다. 교회는 내가 어릴 때 항상 꽉 차 있었다. 우리는 모두 지정된 자리가 있었는데 남자는 아래층, 엄마와 고모들, 사촌들을 포함한 여자들은 위층이었다. 꼬마였던 나는 예배 도중 그들에게 손을 흔들곤 했다. 경전의 히브리어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음악 소리, 특히 아름다운 성가대가 이끌어주는 오래된 중세 기도 음악을 듣는 것이 좋았다.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교회 앞에서 만나 뒤섞였다. 그리고 플로리 고모와 세 아이의 집까지 걸어가, 우리의 점심 식욕을 자극하는 달콤한 적포도주와 케이크를 먹으며 기도를 올렸다. 게필테피쉬와 연어, 비트뿌리 젤리 같은 차가운 점심을 먹은 뒤 토요일 오후 부모님은, 병원의 응급 전화가 방해하지 않는 한, 가족 방문에 전념했다. 삼촌과 고모, 사촌들이 와서 차를 마시거나 우리가 갔다. 우리는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모여 살았다.
2차 세계대전은 크리클우드의 유대인 공동체를 파괴했고, 전후 몇 년 동안 수천 명이 영국의 유태인 공동체를 떠났다. 내 사촌들을 포함해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호주로, 캐나다로 미국으로 떠났다. 내 큰 형 마커스는 1950년에 호주로 떠났다. 그들 중 다수가 유대교의 격식에서 멀어져 희미해졌고 제2의 조국으로 동화됐다. 어렸을 때 꽉 차던 우리 교회는 해마다 점점 비어갔다.
나는 1946년 비교적 사람들이 많던 교회에서 수십 명의 친척들과 함께 계율 기도를 올렸는데, 그게 나에게는 마지막 공식적인 유대인 예식이었다. 나는 유대인 성인의 종교적 의무 - 매일 기도하고 테필린(유대교 기도 때 몸에 걸치는 옷 - 역주)을 입는 - 를 버렸다. 그리고 점점 신앙과 부모님의 관습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갔지만, 18살 때까지는 특별한 파열의 순간은 없었다. 그해 아버지는 나의 성적 감정을 캐물었고,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내가 말했다. "그건 그냥 감정이에요. 하지만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엄마는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경악한 표정으로 내려와 나에게 소리쳤다. "이 가증스러운 것.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그녀는 레위기의 구절을 의심 없이 믿었다. "남자가 여자와 하듯이 다른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스러운 짓을 저지른 것이니, 그들은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피가 그 위에 뿌려지리라.")
그 문제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가혹한 말들로 인해 나는 종교의 편견과 잔인성을 싫어하게 됐다.
1960년 의사 면허를 딴 뒤, 나는 불쑥 영국과 내가 속해있던 가족, 공동체를 떠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갔다.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을 때 나는 머슬비치의 역도인 마을에 살았고, UCLA에서 신경과 레지던트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의 의미를 깊이 갈망하게 됐고, 결국 1960년대에 자살 직전까지 갈 정도로 암페타민에 중독됐다.
뉴욕에서 의미 있는 일자리를 찾으면서 회복은 천천히 시작됐다. 브롱크스에 있는 요양 병원이었다. (내 책 "깨달음"에서 "카르멜 산"(이스라엘 서북부의 산 - 역주)이라고 내가 썼던 곳이다.) 나는 환자들에게 매료됐고 그들을 깊이 돌봤다. 그러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됐다. - 일반인들은 물론 내 동료 의사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상상조차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내 소명을 발견했고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동료들의 응원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이야기꾼이 됐을 때는, 의학을 소재로 한 내러티브가 거의 멸종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것도 나를 막지는 못했다. 나는 내 뿌리가 위대한 19세기 신경증 연구의 역사 속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의 위대한 신경정신의학자 A.R.루리아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외롭지만 깊은 만족감을 주는 거의 수도승 같은 일에 몇 년 동안 빠져들었다.
1990년대 나는 동년배 사촌인 로버트 존 오만을 알게 됐다. 60살의 나이에도 원기 왕성하고 탄탄한 잘생긴 외모에 흰 턱수염을 기른, 고대 현자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위대한 지적 능력은 물론 인간적인 따뜻함과 애정, 그리고 깊은 종교적 헌신을 가진 사람이다. - "헌신"은 사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제학과 인간사에서 합리성을 지지하며, 이성과 신앙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다.
그는 내가 문에 메주자(유대교 성서가 기록된 양피지 - 역주)를 걸어야 한다고 우겼고, 이스라엘에서 나에게 하나 보내주었다. "네가 믿음이 없다는 거 알아." 그가 말했다. "어쨌든 하나 갖고 있어야 해" 나는 언쟁하지 않았다.
2004년 로버트 존은 수학과 게임이론의 일생 최고의 업적에 관해 주목할 만한 인터뷰를 했다. 그는 가족들 얘기도 했는데, 30명 가까운 아이들과 손자들까지 데리고 스키와 등산을 다니는 얘기, (코셔 요리 (유대교 율법에 따라 만드는 요리 - 역주)에 조리기구까지 다 갖고 다닌다.) 안식일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얘기였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그가 말했다. "신앙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신앙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한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2005년 12월, 로버트 존은 경제학의 핵심적인 연구에 몸 담은 지 50년 만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노벨 위원회에 결코 쉬운 손님이 아니었다. 스톡홀름까지 그 많은 자식과 손자들을 다 데리고 갔는데, 코셔 접시와 밥그릇과 음식은 물론, 성경에서 금지되지 않은 울과 리넨의 혼합섬유로 된 특별한 의복까지 챙겨갔다.
바로 그달에, 나는 한쪽 눈에 암이 생긴 걸 알았다. 그리고 다음 달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있을 때 로버트 존이 병문안 왔다. 그는 노벨상과 스톡홀름의 시상식에 대해 재미있는 얘기들을 엄청나게 갖고 왔지만, 압권은 이 말이었다. 만약 토요일에 스톡홀름에 가야만 했다면, 수상을 거부했을 거란다. 안식일에 대한 그의 헌신, 세상사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과 완전한 평온함은 노벨보다도 우선한다.
1955년 22살 때 나는 이스라엘로 가서 키부츠에서 몇 달 동안 일했다. 비록 즐거웠지만, 다시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꽤 많은 사촌이 그곳으로 이주했지만, 그 중동의 정치는 나를 옥죄었고, 나는 그렇게 종교적인 사회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던 2014년 봄, 내 사촌 마조리 - 우리 어머니가 돌봐주었고 98살까지 현장에서 뛰던 의사다. - 가 거의 죽을 때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작별인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뜻밖에 강하고 울림이 있었고, 우리 어머니의 억양과 거의 똑같았다. "지금 죽을 생각 없다." 그녀가 말했다. "6월 18일에 100살 생일이다. 너 올래?"
나는 말했다. "물론 가야죠." 전화를 끊고 몇 초 만에 나는 거의 60년 된 결심을 뒤집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순수한 가족 방문이었다. 나는 마조리의 100살 생일을 대가족과 함께 축하했다. 런던 시절 나에게 소중했던 사촌 2명을 만났고, 엄청나게 많은 6촌과 먼 친척들, 그리고 물론 로버트 존도 만났다. 가족들은 내가 어릴 적 이미 잊어버린 것 그대로 나를 환대해줬다.
나는 엄격한 가족들을 내 연인 빌리와 함께 방문한다는 게 조금 두려웠다. - 엄마의 말이 아직도 내 마음에 울리고 있었다. - 그러나 빌리 역시 따뜻하게 대접받았다. 그 엄격한 가족들에서조차 얼마나 큰 태도의 변화가 있었는지, 로버트 존은 빌리와 나를 자기 가족들의 안식일 식사에 초대하기까지 했다.
안식일, 멈춰진 세상의 평화, 시간 바깥의 시간은 손에 잡힐 듯 뚜렷했고, 모든 것에 스며들었으며, 나 스스로 아련함, 노스탤지어 비슷한 무언가에 젖어들었다. 만약 A와 B와 C가 달라졌더라면?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을까? 어떤 종류의 삶을 살게 됐을까?
2014년 12월 나는 내 회고록, "On The Move"를 완성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 그때만 해도 내가 9년 전 한쪽 눈에 갖게 된 흑색종으로부터 전이된 전이성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며칠 뒤 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그 사실을 모른 채 회고록을 끝내서 다행이다. 일생에서 처음으로 나의 성 정체성을 완전하고 솔직하게, 세상에 마음을 열고, 내 안에 어떤 죄책감의 비밀도 없이 공개하게 된 것도 다행이다.
지난 2월 나는 내 암을,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사실 이 신문에 에세이 "나의 인생(My Own Life)"이 실릴 때 병원에 있었다. 7월에 나는 신문에 "나의 주기율표(My Periodic Table)"라는 글을 또 썼다. 내가 사랑하는 물리학적 우주와 입자들의 삶을 다룬 글이었다.
그리고 지금, 약하고 짧은 호흡, 한때 단단했지만 암으로 녹아버린 근육을 보며, 내 생각은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가치 있고 좋은 삶의 의미 - 내 안에서 평화를 얻는 - 에 점점 더 기대게 된다. 내 생각은 안식일, 휴식의 날, 한 주의 일곱 번째 날, 그리고 아마도 내 인생의 일곱 번째 날로 움직여 간다. 그 날은 한 인간이 일을 끝내고 한 점 양심의 거리낌 없이 쉬게 되는 날일 것이다.
원문 : http://www.nytimes.com/2015/08/16/opinion/sunday/oliver-sacks-sabbat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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